#이 글은 리더스가이드에 실린 김보일 칼럼 가운데 하나인데, 허락없이 그냥 퍼왔습니다.


건강하게 살자, 아름답게 살자, 여유 있게 살자,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행복이 그렇게 쉽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라면 수많은 현자들이 고통스럽게 사막을 방황하지 않아도 되었고, 석가는 뼈를 깎는 고행을 감행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모든 철학사와 종교사는 말하지 않던가. ‘행복은 어렵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몸이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성경 구절이 아니더라도 몸은 마음대로 척척 부릴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다. 치통 하나에도 절절 매는 것이 아직은 인간의 몸이다. 하지만 기술은 인체마저도 조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기구를 사용해 뼈를 잡아 늘려 키를 늘일 수 있다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키를 한치라도 더 늘일 수 있겠느냐?’라는 예수의 말씀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유전자 지도를 완성한 유전공학의 기술은 이미 신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맞춤형 인간의 탄생이 머지 않았다는 예언이 단순히 호사가들의 발언은 아닌가도 싶지만 어찌했든 기술은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인류에게 갖게 했다.

몸의 식민지화야말로 기술이 꿈꾸는 최후의 땅은 아닌가 싶다. 투명인간이 되든 슈퍼맨이 되든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신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얼마든 키를 늘이고, 체중을 줄이고, 원하는 얼굴을 갖고,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껏 날아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다. 몸은 부자유의 상징이다. 마음이 아무리 비상을 꿈꾸어도 몸은 중력의 법칙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번지점프를 하며 몸의 자유를 증거하려면 중상을 각오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결국 마음 안에서만 인간은 자유로울 뿐이다.

'몸은 상식이 거주하는 장소’라고 말한 사람은 니체였다. 난다 긴다, 내로라 하는 사람들도 많이 마시면 취하는 것이 상식이다. 과식을 하면 속이 더부룩한 것도 상식이다.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면 건장한 청년의 마음과 몸이 딸랑거리는 것도 상식이다. 몸은 단순하다. 삼정승 육판서의 몸이라고 해서 백정의 몸과 다를 게 없다. 몸의 요구 앞에 만인은 평등한 것이다.

작금의 웰빙 열풍을 보고 있노라면 몸마저도 철저히 계층화되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누구는 유기농 식품을 먹고, 건강에 좋은 와인을 마시고, 호흡기에 좋다는 청정기를 들여놓고, 몸을 만들기 위해서 헬스를 하고, 요가를 배운다는데, 어떤 사람은 도무지 여유가 없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젖꼭지와 젖병 몸체를 의학용 고급 실리콘으로 제작, 환경 호르몬으로부터 안전하며, 엄마 가슴과 같이 부드러워 아이들의 감성 발달에 도움을 준다는 초고가의 젖꼭지를 물 수 있는 아이들이 이 땅에 얼마나 있을까. ‘풍년 거지가 더 서럽다’라던가. 그저 하루하루 생활하기도 벅찬데, 명품이다 뭐다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시리다.

잘 산다는 것이 언젠가부터 잘 소비한다는 것이 되었다. 잘 소비한다는 것이 좋은 것을 구매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 것도 작금의 웰빙(Wellbeing) 열풍이다. 웰빙은 말 그래도 잘 존재하기다. 웰빙족은 육류 대신 생선을 찾고, 유기농 식품을 먹으며, 화학조미료와 탄산음료를 멀리 하고, 요가나 정신 수련을 겸한 운동을 통해 심신의 안정과 건강을 추구한단다. 웰빙족들은 과시적 고급 소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해 조화롭고 건전한 소비를 하며, 생명과 자연의 가치를 중시하고,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되,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사회적 건강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출세 지향의 지나치게 바쁜 생활로부터 벗어나 몸과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고, 값비싼 레스토랑 식사 대신 가벼운 생식을 즐기고, 절약한 돈으로 가끔씩 스파 마사지에도 아낌없이 투자하여 여유도 즐긴단다.

그러나 광고의 마케터들은 고가의 상품을 웰빙의 개념과 연관짓기가 일쑤다.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 명품관들은 웰빙이란 단어를 그저 지나치지 않는다. 명품관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한다. “잘 존재하려면 잘 소비하라”

생명과 자연의 가치를 중시하고, 마음의 조화와 균형을 꾀하라는 웰빙족의 강령(?)을 듣다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무위당(無爲堂) 장일순 선생이다. 그는 웰빙족이 말하는 생명과 자연의 가치를 중시했고, 마음의 조화와 균형을 꾀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장일순 선생에게 ‘웰빙’이란 단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그저 존재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잘 존재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장일순 선생의 이름이 ‘조용필’이나 ‘서태지’만큼 알려진 것이 아니니 잘 존재했다는 말에도 어폐는 있다. 67세를 일기로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천수를 누린 것도 아니다. 기념비적인 저술도 없다. 한 그루의 나무가 그러하듯 그는 그저 원주의 한 구석에서 자신의 삶을 조용히 이어갔을 뿐이다.

장일순 선생의 한 지인이 전하는 에피소드 한 대목은 마음을 치는 곳이 있다.

초겨울 저녁, 술 한잔을 걸쳐 약간 취기에 찬 장일순 선생은 쌀쌀한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하고 무엇을 보더라는 것이었다. 고구마를 자시려는가 해서 "군고구마 자시겠어요?"라고 여쭈니 장일순 선생 말씀하시기를 "아니, 그게 아니고, 저기 군고구마라고 쓴 글을 보게. 초롱불 아래 저 글씨를 보게. 저 글씨를 보면 고구마가 머리에 떠오르고, 손에는 따뜻한 고구마를 쥐고 싶어지고, 가슴에는 따뜻한 사람의 정감이 느껴지지 않나. 결국 어설프게 보이지만 저게 진짜고 내가 쓴 것은 죽어 있는 글씨야. 즉 가짜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 글씨는 장난친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서예로 이미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장일순이 아닌가. 그런 그가 진짜 글씨 앞에서 숙연해 하고 있는 것이다.

장일순 선생의 겸손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의 글씨는 그의 글씨대로 훌륭하고, 그의 삶은 그의 삶대로 가치가 있다. 이름 없는 무지렁이 백성들의 삶 앞에서 겸손해 하는 것도 자칫 하나의 상투적 제스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에는 삶이 묻어 나와야 한다는 장일순 선생의 자의식은 폄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듯싶다. 또한 사소한 것, 그저 지나칠 수 있는 것에 눈길을 주는 그의 지적인 성찰 또한 값진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녀리고 힘없는 존재들, 자신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고도 장대하게 펼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한 장일순 선생의 연민의 시선 또한 값진 것이다.

장일순 선생에게 가녀리고 힘없는 존재들은 독재 정권 하에서 신음하던 소위 ‘민중’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라져 가는 이 땅의 생물들, 오염되는 산천과 하늘,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생명 있는 것들이 그에게는 모두 가녀린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밥이 곧 하늘이고 모든 생명은 하나임을 일깨우며 1980년대엔 '한살림' 운동을 이끌어냈던 것도 장일순 선생의 생명 가진 것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젊은 시절부터 무위당에게 가르침을 받고 난초 치는 법을 깨우친 김지하 시인은 ‘밑으로 기어라'와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마라'는 장일순 선생의 두 가지 말씀이 나이 들수록 생각난다고 했다.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니 이야말로 시류에 뒤떨어져도 한참이나 뒤떨어진 말씀이시다. 그런 생각대로라면 가난은 필연적이다. 인력시장에서 자신의 부가가치를 높이려고 안달인 세상 아닌가. 나 혼자 의연하게 군자연해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니, 장일순 선생을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자로 치부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국가를 경영하는 정치지도자들에게 이런 무위(無爲)의 철학은 대책 없는 망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컴퓨터로 글을 쓰지 않고, 나는 오직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는 신념으로 원고지 한 장 한 장, 뼈를 깎는 습작에 몰입하는 작가지망생에게도 이런 말씀은 위협적 일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에게도 장일순 선생의 말씀은 역시 위협적이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 박재삼, <천년의 바람>

짝짓기를 하고 식솔들을 거느리는 우리네 일상의 삶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욕망을 성취해가는 과정이 아닌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동물들 또한 짝짓기를 하고 식솔들을 거느리고 그렇게 몇 천만년을 살아왔다. 바람이 소나무 가지에 간지러움을 주며 ‘천년 전’의 장난을 되풀이하듯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도, 씨 뿌리고, 거름 매고, 추수하면서 ‘천년 전’의 농사꾼들이 하던 짓을 되풀이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인간들이 ‘딴 짓거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온 음료와 탄산음료의 제조, 이런 것들은 동물들이 하는 짓거리가 아니다. 슈퍼마켓의 각종 음료들을 보시라. 인간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대체 저렇게 많은 음료들이 필요할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생산은 언제나 욕망과 필요를 넘어선다. 살을 빼고, 얼굴을 째고, 웰빙이니 명품이니 들먹거리는 인간의 모든 짓거리들이 동물들이 하는 ‘천년 전’의 짓거리가 아니다. 무위당(無爲堂)은 그 호(號)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 좀 해두게’

더구나 우리와 더불어 있는 것들이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연어들과 크낙새들이 사라지고, 풍물소리가 죽고, 땅에 기반을 둔 향토의 문화가 사라져 가는 곳에서 과연 웰빙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과 연루되어 있다. 끊임없이 욕망을 충동질하는 자본주의의 일상, 하나 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없이는 웰빙은 없다.